2012. 12. 8.

sumer job

데드라인을 놓쳤다.
너무 생각 없이 살았다.

한화에서 여름 인턴을 하는 것을 우선순위는 낮지만 하나의 옵션으로 생각했고 마지막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원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약 4시간 차이로 지원을 못했다. 왜 더 일찍 확인을 안했는지 모르겠다.
되도 안갈 회사라는 자만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여름에 뭐하지 라는 걱정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내 나태함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아직도 여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혹은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옵션이 다양할 수록 좋을텐데 한 가지 옵션을 너무나 멍청하게 날려버렸다.

핑계를 대자면 이번 학기 학점이 뜬 뒤에 시작하려 했었다는 것 정도...

이 일을 본보기 삼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이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

2012. 11. 13.

내가 유학을 오기까지

어느새 5년 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고 잊을 수 없는 그 날들을 되새기며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배경은 2007년.

4월, 중간고사 3일차쯤 되던 날 야간자습시간 축하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당연히 왜 축하를 하는지 알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복도로 나가 컴퓨터를 켰다. 제 48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로 선발되었다. 급하게 여기저기 연락 돌리고 축하를 받느라 기분이 들떠서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그 중간고사 성적이 그대로 기말고사 성적이 되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집중이 안되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날 가족들이랑 파크뷰에서 식사할 때 쯤 되서야 실감이 났다. 아 내가 IMO 대표라니.

그 후엔 정말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기말고사를 안보니 학교 수업도 귀에 안들어오고 빨리 집중교육에 들어갈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부모님과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국가대표가 된 것으로 어느정도 원하는 곳 아무데나 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니 부모님은 당연히 의대를 권했고 나도 수긍했다. 그렇게 IMO에 나가기 직전까지도 나는 서울대 의대에 갈 줄 알았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권했고 집중교육을 하면서 화학 심층을 다닐 생각도 했었다.

이렇게 의대 문턱에 발을 올려놨던 내가 유학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어찌보면 충동적이었다. 베트남에서 귀국해서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부모님께 말씀 드렸다.
"나 유학가고 싶어."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단 한번도 다시 의대 갈 것을 권하지 않은 부모님이 존경스럽다.

난 베트남에서 뭘 보고 느꼈던 걸까?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미국팀 애들 때문이었을까? 원래 내 뜻이 아니었던 의대가 별로 맘에 안들었나? 의대가 재미 없어 보였던 것은 확실하다. 수학 공부하는 것이 막연히 좋았던 것이 컸나보다. 아님 더 큰 물에서 노는 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사실 아빠가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의대 가라고 다 꼬셔놨는데 유학을 가고 싶다네."
그 문장 앞과 뒤는 못 들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어떤 맥락으로 말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빠에게 물어봐야겠다. 그 2007년 여름 부모님이 나에게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유학에 대한 뜻을 피력한 이후의 유학준비는 일사천리였다. 엄마는 지금의 나를 키운 사람이다. 정말 빠르게 학원도 알아보고 나 처럼 국가대표를 하고 유학을 간 선배들의 어머님들과 연락을 했다. 결국 학원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원서 작업도 학원에서 도와주기로 했지만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기에 여유로운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8월에 귀국한 이후로 12월 원서 마감일까지 정말 길었던 하반기는 수학 올림피아드 공부를 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정말 힘들었다.

모든 것은 영어점수 따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토플, sat, sat2 이렇게 세 시험점수가 아무래도 필요했는데 사실상 시험을 볼 수 있는 달은 10, 11, 12월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 같다. 12월에 마감인데 10월에 SAT2를 보고 11, 12월에 SAT를 봤다니... 심지어 SAT2는 일본 가서 보고왔다. 그때 삼촌이랑 함께 다녀왔는데 그 1박 2일은 아직도 정말 선명하다. 어디서 뭘 했고 뭘 먹었는지도 기억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내 친구 중 한 명도 나처럼 일본에서 시험을 봤는데 갈 때 올 때 모두 공항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걔는 나보다 훨씬 일찍 준비를 시작했을 것 같은데 어쩌다 일본까지 오게되었는지... 여튼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10, 11, 12월 중 뒤의 두 달에 모두 SAT를 보기로 결정한 것은 내 미천한 영어실력 탓이 컸다. 처음 모의시험을 봤을 때 리딩이랑 라이팅 모두 절반도 못 맞았다. 거의 때려칠려 했는데 그땐 그냥 오기로 버틴 것 같다. 아이대표니까 2천점만 넘기면 갈만큼 가겠지 하는 막연한 자신감도 크게 작용했다. 물론 2천점 넘는게 쉽진 않았다.

이 외에는 딱히 특별한 기억은 없다. 토플을 4번 정도 본 것 같고 절대 안오르는 스피킹 점수에 좌절했었다. SAT 라이팅 12점 받았다. 그렇게 시험점수가 다 모이고 원서를 잘 냈고 추천서도 내가 다 써서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지원도 안해준 고등학교가 원망스러운데 그 땐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혼자 모든 것을 처리했다. 추천서를 내가 쓰고 교정받고 내가 번역해서 내가 보내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물론 해피엔딩이다. 원하던 학교들 중 한 곳에 붙어서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다음 이야기들 중 하나는 내가 IMO에 나가기까지가 될 것이다. 요즘 내가 가야할 길을 정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지만 그만큼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많이 미화되었지만 더 미화되어 추억으로 남기 전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겠다.

2012. 11. 4.

[퍼온 글] 당연한 것을 계속 당연하게 하는 힘

원글: 서인석 (설곽 13기)

수학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중 하나가 "당연하다" 이다. (그런데 우리학과 모교수님이 쓴 선대책에는 이상하게 저 표현이 자주 들어가는게 이상하다. -_-;; ) 아무튼, 앞으로 수학과목 듣는분은 시험지에 "당연하다" 란 표현은 가급적 쓰지 말자. "당연하다" 대신 수학에서는 "자명하다" 라는 표현을 즐겨쓴다. 자명하다는 것은 곧 너무 사소해서 증명할 필요 없다는 뜻인 반면 당연하다는 것은 뭔가 논리적 갭이 느껴지는 것일까?

세상에는 당연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얼마전까지 삼성화재가 프로배구 우승을 하는 것은 당연했었다. 임요환이 장진남을 이기는 것도 당연하고 맨날 전교1등만 하던 모범생이 수능도 잘봐서 서울의대에 가는것도 당연하다.

이런 것들은 밖에서 보기엔 당연할지 모르나 당사자들 에게는 분명 당연하지 않을 것이다. 삼성화재가 우승하는게 당연하다고 해서 삼성선수들은 맨날 당연히 자기네가 우승할 거란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을까? 임요환은 장진남 상대로 겜할때는 연습도 안하고 와서 대충 했을까? 모범생은 서울의대 갈것을 당연히 여기고 수능준비를 발로 했을까?

이런 당연한 것들은 당사자들의 끊임없는 피나는 노력이 그 뒤에 있어 당연해 지는것이다. 오늘도 시험결과에서 1등을 한 학생을 보며 또 당연히 1등했구나 라고 생각하며 받아넘기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왜 1등을 했는지 종종 잊게 된다. 반면 1등을 해도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학생은 "당연해야 되는 1등" 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부담감에 더욱 피나는 노력을 해야한다. 아무도 삼성화재의 우승을 축하해 주기는 커녕 쟤네 떄문에 배구판이 안커진다고 우려를 해도 삼성화재는 우승을 위해 뼈를 깎는 연습을 해야 했다.

삼성화재가 결승전에서 진날, 당연한 것이 더이상 당연해 지지 않게 되는 그날이 찾아온 것이다. 그 배경에는 현대선수들의 와신상담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은 이처럼 지키기 힘든 것이며 계속 도전을 받고 지켜내는 자리이다. 그러나 그것을 두 걸음 밖에서 보면 한낱 "당연한 것"에 불과하며 그의 고뇌와 노력은 잊게 된다.

오늘도 주변에서 보는 시험마다 상위권을 유지하며 학점을 4.2를 넘나드는 사람의 시험1등, 볼때마다 이기는 프로게이머의 승리, 맨날 잘한다는 얘기만 들어오던 엄마친구 아들의 성공을 당연하다고 넘기는 것은 아닌가.

임요환이 최가람에게 져서 8강에 탈락했을 때, 모든 사람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임요환이 최가람에게 이기는 것은 소위 "당연한 것" 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오기만 하면 완벽하게 틀어막아 줄 때는 아무도 별 관심을 안가지던 오승환이 5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자 수많은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기사가 난 것은 왜였을까?

오늘도 수많은 "아직 당연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에게 경의를 표한다.

2012. 11. 3.

멘토링 1

Ph.D.는 학부 공부와는 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굉장히 많이 다르다.
학부 수준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 있지만 대학원에 가면 좋든 싫든 엄청난 Tool들을 얻게 되고 그것들을 활용하면 더 의미있는 질문에 대한 효과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수학만 공부 하더라도 econ Ph.D.를 할 수 있다.
MS&E에도 내가 관심이 있을만한 분야가 있을 수 있다.

연구를 해보거나 연구 보조를 해보거나 Ph.D.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라.
필드에서도 학계로 올 수 있고 학계에서도 필드로 언제나 갈 수 있다.
교수를 컨택하거나 대학원생을 컨택해라.

Econometrics란 모델링을 통해 실제 현상을 분석하고 대입하고 더 나은 모델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Grad school 과목들을 들어봐라. 그 세계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아직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게 나을 수도 있다.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나랑 잘 맞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여름에 그냥 일을 해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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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 school 과목 들어보기
MS&E 탐색
관심분야 / 여름 리서치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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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everything is up to me.
더불어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 고생을 하는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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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뭘까?
진짜?

Salesforce.com 회의 통역을 마치고

세일즈포스는 통역 알바 제의를 받고 나서 검색을 해보고서야 처음으로 무슨 회사인지를 알았다. 요즘 가장 핫이슈인 혁신을 몸소 실천하는 회사들 중 하나였다.

같이 방문하신 분들 중 클라우드 관련 컨설팅을 하시는 분이 공학, 특히 컴퓨터를 잘 배워놓으라고 하셨다. 그분은 그 옛날에 CS로 대학원을 가시고 미국에서 일하다가 한국에서 관련 컨설팅을 하고 계신다. 아무래도 미래는 모바일+가전기기 들의 첨단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것을 묶어주는 것이 클라우드일텐데 관련 공부를 해 두는 것이 어떤 전공을 하던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신기했다. 내가 모르는 회사가 세워진지 얼마 안된 스타트업이고 규모가 이미 포츈지에 오르내릴 정도인데다가 여러 방면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니. 물론 내가 전혀 관심 없던 분야기도 하지만 역시 세상이 넓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다양한 경험, 넓은 인관관계 뭐 이런 늘 중요하다고 하는 것들이 왜 중요한지 제대로 느낀 것 같다.

2012. 10. 25.

김연아의 눈물

2010년 겨울 난 미국에 있었고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벤쿠버였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경기들을 모두 관전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시즌 내내 열린 경기들 중 대부분을 라이브로 지켜봤고 김연아는 대부분의 대회를 우승하며 금메달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모두가 예상했고 모두가 원했던 그런 순간이었다. 그래서 벤쿠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 결선은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 한 긴장감이 흐르는  그런 이상한 경기였다.

나는 행여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경기를 지켜봤고 고난도 점프를 뛸 때 마다 숨을 참으며 집중을 했다. 4분 가량의 프리 스케이팅은 아무 실수 없이 끝났다. 완벽했다. 그렇게 연기가 끝나고 그녀는 눈물을 터뜨렸다. 웃으며 관객에게 인사해주고 싶었겠지만 터져나오는걸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그 눈물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감히 내가 어찌 알겠냐만은 무언가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는 그 생각과 이를 통해 그동안 어깨를 짓눌러왔던 부담감, 주위의 기대, 사람들의 관심을 모두 털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그 눈물은 결코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애써 웃음짓는 것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나의 머리를 관통한 생각은 나에게도 저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였다.

최고인 사람이 다시 최고로 인정 받는 것을 보면서 이런 큰 감동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동안 봐온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이나 양궁, 하다 못해 매번 내신 시험에서 1등을 하던 내 친구를 보면서 감동을 크게 느끼진 않았으니 말이다. 김연아의 금메달은 왜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왔는지 생각해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어떤 선수생활을 해왔는지 그 힘겨웠던 과거를 알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난 솔직히 우리나라 피겨선수들이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훈련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롯데월드는 꽤나 좋은 아이스링크라고 한다. 그녀가 이슈가 되면서 이런 문제들이 수면으로 떠올랐고 어느 정도 성적을 내기 시작하고 부터는 해외 전지훈련을 다니고 우리나라의 피겨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그녀는 허리부상도 있었다. 사실 없는 것이 이상하지. 그녀가 부상 회복을 위해 스케이트를 잠시 쉬자 언론은 선수생명이 위험하다며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등을 돌렸었다. 물론 우리의 여왕은 한 번 넘어졌다고 주저앉지 않고 누구보다 멋지게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렇다고 이게 이유일리는 없다. 힘든 환경에서 자라 결실을 맺은 운동선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그녀가 다른 것이 아니라면 내가 옛날보다 성장한 것일까? 그녀의 화려한 무대 뒤에 숨겨진 고통과 인내에 대해 더 가슴 속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미래의 누군가가 2009-2010 겨울 시즌의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와 올림픽의 결과를 살펴본다면 김연아의 우승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느낄 것이다. 대회 전에도 당연했고 결과도 너무나 당연했다. 내가 가슴이 깨달은 것은 이 당연하다는 사실에 대한 왠지모를 거부감이었던 것 같다.

당연하다고? 그녀가 이룬 것은 하나도 당연할 것이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생각해온 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보여준 표정은 당연히 완벽한 공연을 한 김연아가 아니었다. 그녀가 당연히 금메달일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김연아 본인에게도 그녀와 함께 출전한 선수들에게도 너무나 큰 모욕이었다. 나의 깨달음은 나를 짓눌렀고 반성하게 했고 당연한게 어딨냐는 의문을 가슴 속 깊이 심어주었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그 자리에 있기 까지의 모든 과정은 당연할게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싸워온 것은 다른 이들의 당연한 예측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녀는 이루었다. 그 눈물 뒤에 고통이 있었을 지 환희가 있었을 지 혹은 짜릿함과 안도감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눈물은 나를 자극했고 세상의 모든 당연한 것들에 대한 깨달음도 함께 주었다.

살다 보면 당연하다는 표현을 쓰게 된다. 이번 한국시리즈만 해도 당연히 삼성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시즌 시작 전에는 두산은 당연히 우승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두산이 우승하는 것은 정말 감동적일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고 모두의 예측을 뒤엎는 엄청난 노력과 드라마가 펼쳐진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당연히 삼성이 우승하더라도, 시리즈가 재미가 없더라도 같은 감동을 느낄 것 같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으니까.

2012. 10. 13.

부모님과 눈물

지금까지 살면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눈물이 있다. 동계 올림픽에서 자신의 무대를 만족스럽게 마친 김연아의 눈물,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정말 흘렸는지도 모르는 부모님의 눈물, 그리고 내가 흘렸던 모든 눈물이다. 각각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오지만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그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입대 전까지 난 별로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펑펑 울었던 기억 중 아직 까지도 초등학교 6학년의 그 날이 기억날 뿐 그 이후로는 눈물 한번 쏟지 않고 8년을 보냈다. (사실 오프 더 레코드로 정말 많이 울었던 적이 있다. 잊을 수 없지만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문제는 그와 같이 감정도 메말라 갔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엔 여자애한테 로봇 같단 말도 들어봤다. 그렇게 사라졌던 감정은 여자친구와 함께 돌아온다. 그 얘긴 다음에 하기로 하자. 내 눈물샘을 다시 활성화 시킨 것은 결국 그녀는 아니었으니까.

이런 내 성향이 생긴 것을 어느 정도는 부모님 탓을 하고 싶다. 두 분 모두 한번도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엄마가 울먹거리는 것은 한 번 본 적 있지만 나 때문은 아니었고 그땐 우리 가족 모두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다. 처음 유학 떠나는 날도 훈련소 입소하는 날도 웃는 얼굴로 헤어졌었다. 그러니 내가 영향 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랬던 나에게 감성적인 면을 키워준 것은 여자친구였다. 결국 사랑을 해야 성숙해지고 그 과정에서 감정이 풍부해지는 것 같다.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게 된다. 날 선 고슴도치 같았던 나의 겉모습을 녹여 주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성향이 있고 가끔은 그것을 위해 남을 공격하기도 한다. 쉽게 망가지지 않는 사람인데 그녀 앞에서는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울어도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슬픔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인지 아니면 내가 표현에 서툴러서 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던 내가 군대에 가서 언제라도 눈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부모님이었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다. 고등학교에서도 대학교에서도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건 만 고작 8주 정도 되는 훈련소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군대의 특수성보다는 그냥 내가 철이 든 것일 수도 있다. 엄마 아빠가 지금까지 나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더 자세히 이해한 것이 계기일 것 같다.

그 후로는 정말 매일 후회가 쌓인다. 매일 아침을 먹고 아빠 출근 길을 배웅하면서도 사랑한단 말 한마디 못하는 아들이 되어버린 것이 제일 후회된다. 부모님께 한 걸음 다가가기가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바보같이 살아오지 않았을 텐데……

역시 나는 아직도 멀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

감정이 있는 사람이 되어 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국 남들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부모님의 인생의 무게도 알아 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이라도 제대로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처음 블로그를 열고 글을 쓴지 두 달이 조금 넘었다. 핑계를 대자면 그 동안 너무 바빴다고 하겠지만 당연히 개소리고 결국은 잊고 있었다. 시작해야지 하면서 블로그를 시작하기 까지 걸린 시간만큼 첫 글과 두 번째 글 사이가 길다.

그 두 달을 정리해보고 넘어가야겠다. 결국은 군생활 정리가 되겠지. 첫 글을 쓴 뒤에는 긴 휴가가 있었다. 휴가라지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하루하루 끝나가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매일 걱정과 시간낭비만 했던 것 같다. 클리어링 기간도 흘려 보냈고 군생활을 잘 마무리하는 데에 집중했었다. 마지막 날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지만 결국은 끝났다. 나를 잡고 있던 제일 무거운 족쇄를 떨쳐냈다. 결국 그뿐이다. 끝났으니까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얻어가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개소리다. 나의 2년은 버려졌고 나는 최대한 열심히 분리수거를 해서 얻어갈 수 있는 최대한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카투사였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상대적으로 많았다. 나는 그 시간의 90% 이상을 가족과 여자친구에게 할애했다. 부대에서 공부하고 책 읽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나름의 스트레스와 훈련 등으로 인해 자유시간 활용이 잘 되지 않았다. 방을 혼자 쓴 것과 노트북을 가져간 것도 큰 이유였다. 당직, 훈련 등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고 가족과 여자친구를 만났다.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군대를 다니면서 가족 생각을 정말 많이 했는데 부모님께 보답하는 방법이 많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엄마가 해주는 밥을 최대한 먹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대학교가 모두 기숙학교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엄마밥을 많이 못 먹은 것이 훈련소 때부터 머리에 맴돌았었다. 제대 이후에도 매일 아침 아빠가 출근하기 전에 같이 밥을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많은데 매일 아침 먹으면 되지 뭐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산 것 같다. 여자친구도 매일 만났다. 주말은 너무 짧았다. 2년간 우린 서로 많이 성장했다. 2년 전 이 즈음 했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중인데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이 쉽지만은 않다. 떨어져 지낸 기간이 긴 만큼 매주 볼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좋았다. 그래 사실 이 것 하나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군생활이었다.

제대 이후 출국까지 18일은 평온했다. 매일 아침을 먹고 공부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데이트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인사를 드리고 공부할 준비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빠르진 않았다. 그냥 무난한 시간이 흐르고 왜 그 긴 기간 이 블로그를 방치했는지는 모르겠다. 쓰고 싶은 것이 생각나서 써야지 하다가 까먹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이제 돌아왔으니 다시 시작이다.

2012. 7. 30.

그래, 글을 쓰자

지난 토요일에 삼성전자 프론티어 멤버십 테크 포럼이 있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초청강연을 들었고 그러한 강연을 들을 때마다 으레 그렇듯 다양한 조언을 들었다.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그 중 하나의 조언을 실천하기로 했다.

주 2회 이상 글을 써라.

글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해야 내가 얻은 것이 내 것이 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만큼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글을 썼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만큼 글쓰기에 흥미가 없었던 나인데 이렇게 변화의 첫 걸음을 시작한 것을 보면 좋은 강연을 들은 것만은 확실하다.


첫 글은 무엇을 써야 할까? 이 생각을 하느라 어제 만든 블로그에 오늘 글을 쓰는데 아직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 생각을 남기는 것에 주력하기로 했다. 토요일의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테크포럼을 정리해서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 만남은 4년전 여름이었고 그땐 1박 2일로 워크샵을 갔었다. 나는 신입회원이었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역시 조별로 친해지는 과정과 초청강연이 있었다. 초청강연은 이상한 아줌마였는데 매우 싫었던 느낌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지금 같은 강연을 듣는다면 달라질지 궁금하다. 당시에는 그 워크샵에 참가한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어지간히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 후 저녁에는 저녁식사 이후 레크리에이션 시간만 기억이 난다. 신입회원들은 간단한 장기자랑을 했고 서울대 엠플리파이어가 공연하러 왔었다. 밴드는 멋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밤에는 숙소에서 두런두런 모여앉아 과자와 술을 마셨다. 기억 역시 어렴풋 하지만 고등학교 선배들이랑 어울렸었다.

어쨌든 이런 워크샵에 대한 그저 그런 기억때문에, 그리고 지인이 없는 곳에 혼자 가는 부담감 때문에 걱정이 앞섰던 나였다.(군인같은 외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고등학교 후배들을 만났고 근처 자리에 앉아 있던 9기 동기들도 만났다. 그 좋은 인연들을 왜 4년 전에 미리 알지 못하고 가꾸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특히 버클리를 다니다 이번 여름에 졸업한 친구를 미리 알았더라면 나도 버클리에 지인이 있었을 수 있는데 말이다. 1년에 한 번 있는 이런 워크샵으로 멤버십을 유지하기에는 확실히 힘이 들 것이다. 동기들과 저녁 자리에서 이야기하며 이 것을 유지해나갈 방법을 많이 이야기 했는데 결국은 삼성이 아닌 멤버 중 누군가가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기적이지만 여유있는 선배가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프로그램은 많이 달랐다. 신입 회원들의 패기넘치는 포부 자랑이 먼저 있었고 선배 회원들의 전문분야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정지훈 교수의 초청강연이 있었는데 이 강연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IT라는 주제를 가지고 미래와 융합이라는 두 키워드를 소개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슴에 와닿는 강연을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여기에 글을 쓰기 시작하기도 했고 여유가 되면 그분이 쓴 책도 찾아 볼 생각이다.

결국 가슴을 가장 강하게 때린 한마디는 실과 구슬 이야기였다. 아름답고 강한 구슬들은 많지만 그 구슬들을 이어줄 실은 우리사회에 너무나 부족하다고. 물론 아무나 실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내가 그런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여하튼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나에게도 뭔가 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가끔 느끼지만 난 아직 굉장히 젊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