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5년 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고 잊을 수 없는 그 날들을 되새기며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배경은 2007년.
4월, 중간고사 3일차쯤 되던 날 야간자습시간 축하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당연히 왜 축하를 하는지 알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복도로 나가 컴퓨터를 켰다. 제 48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로 선발되었다. 급하게 여기저기 연락 돌리고 축하를 받느라 기분이 들떠서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그 중간고사 성적이 그대로 기말고사 성적이 되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집중이 안되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날 가족들이랑 파크뷰에서 식사할 때 쯤 되서야 실감이 났다. 아 내가 IMO 대표라니.
그 후엔 정말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기말고사를 안보니 학교 수업도 귀에 안들어오고 빨리 집중교육에 들어갈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부모님과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국가대표가 된 것으로 어느정도 원하는 곳 아무데나 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니 부모님은 당연히 의대를 권했고 나도 수긍했다. 그렇게 IMO에 나가기 직전까지도 나는 서울대 의대에 갈 줄 알았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권했고 집중교육을 하면서 화학 심층을 다닐 생각도 했었다.
이렇게 의대 문턱에 발을 올려놨던 내가 유학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어찌보면 충동적이었다. 베트남에서 귀국해서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부모님께 말씀 드렸다.
"나 유학가고 싶어."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단 한번도 다시 의대 갈 것을 권하지 않은 부모님이 존경스럽다.
난 베트남에서 뭘 보고 느꼈던 걸까?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미국팀 애들 때문이었을까? 원래 내 뜻이 아니었던 의대가 별로 맘에 안들었나? 의대가 재미 없어 보였던 것은 확실하다. 수학 공부하는 것이 막연히 좋았던 것이 컸나보다. 아님 더 큰 물에서 노는 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사실 아빠가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의대 가라고 다 꼬셔놨는데 유학을 가고 싶다네."
그 문장 앞과 뒤는 못 들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어떤 맥락으로 말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빠에게 물어봐야겠다. 그 2007년 여름 부모님이 나에게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유학에 대한 뜻을 피력한 이후의 유학준비는 일사천리였다. 엄마는 지금의 나를 키운 사람이다. 정말 빠르게 학원도 알아보고 나 처럼 국가대표를 하고 유학을 간 선배들의 어머님들과 연락을 했다. 결국 학원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원서 작업도 학원에서 도와주기로 했지만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기에 여유로운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8월에 귀국한 이후로 12월 원서 마감일까지 정말 길었던 하반기는 수학 올림피아드 공부를 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정말 힘들었다.
모든 것은 영어점수 따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토플, sat, sat2 이렇게 세 시험점수가 아무래도 필요했는데 사실상 시험을 볼 수 있는 달은 10, 11, 12월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 같다. 12월에 마감인데 10월에 SAT2를 보고 11, 12월에 SAT를 봤다니... 심지어 SAT2는 일본 가서 보고왔다. 그때 삼촌이랑 함께 다녀왔는데 그 1박 2일은 아직도 정말 선명하다. 어디서 뭘 했고 뭘 먹었는지도 기억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내 친구 중 한 명도 나처럼 일본에서 시험을 봤는데 갈 때 올 때 모두 공항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걔는 나보다 훨씬 일찍 준비를 시작했을 것 같은데 어쩌다 일본까지 오게되었는지... 여튼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10, 11, 12월 중 뒤의 두 달에 모두 SAT를 보기로 결정한 것은 내 미천한 영어실력 탓이 컸다. 처음 모의시험을 봤을 때 리딩이랑 라이팅 모두 절반도 못 맞았다. 거의 때려칠려 했는데 그땐 그냥 오기로 버틴 것 같다. 아이대표니까 2천점만 넘기면 갈만큼 가겠지 하는 막연한 자신감도 크게 작용했다. 물론 2천점 넘는게 쉽진 않았다.
이 외에는 딱히 특별한 기억은 없다. 토플을 4번 정도 본 것 같고 절대 안오르는 스피킹 점수에 좌절했었다. SAT 라이팅 12점 받았다. 그렇게 시험점수가 다 모이고 원서를 잘 냈고 추천서도 내가 다 써서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지원도 안해준 고등학교가 원망스러운데 그 땐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혼자 모든 것을 처리했다. 추천서를 내가 쓰고 교정받고 내가 번역해서 내가 보내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물론 해피엔딩이다. 원하던 학교들 중 한 곳에 붙어서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다음 이야기들 중 하나는 내가 IMO에 나가기까지가 될 것이다. 요즘 내가 가야할 길을 정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지만 그만큼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많이 미화되었지만 더 미화되어 추억으로 남기 전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