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겨울 난 미국에 있었고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벤쿠버였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경기들을 모두 관전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시즌 내내 열린 경기들 중 대부분을 라이브로 지켜봤고 김연아는 대부분의 대회를 우승하며 금메달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모두가 예상했고 모두가 원했던 그런 순간이었다. 그래서 벤쿠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 결선은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 한 긴장감이 흐르는 그런 이상한 경기였다.
나는 행여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경기를 지켜봤고 고난도 점프를 뛸 때 마다 숨을 참으며 집중을 했다. 4분 가량의 프리 스케이팅은 아무 실수 없이 끝났다. 완벽했다. 그렇게 연기가 끝나고 그녀는 눈물을 터뜨렸다. 웃으며 관객에게 인사해주고 싶었겠지만 터져나오는걸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그 눈물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감히 내가 어찌 알겠냐만은 무언가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는 그 생각과 이를 통해 그동안 어깨를 짓눌러왔던 부담감, 주위의 기대, 사람들의 관심을 모두 털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그 눈물은 결코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애써 웃음짓는 것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나의 머리를 관통한 생각은 나에게도 저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였다.
최고인 사람이 다시 최고로 인정 받는 것을 보면서 이런 큰 감동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동안 봐온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이나 양궁, 하다 못해 매번 내신 시험에서 1등을 하던 내 친구를 보면서 감동을 크게 느끼진 않았으니 말이다. 김연아의 금메달은 왜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왔는지 생각해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어떤 선수생활을 해왔는지 그 힘겨웠던 과거를 알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난 솔직히 우리나라 피겨선수들이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훈련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롯데월드는 꽤나 좋은 아이스링크라고 한다. 그녀가 이슈가 되면서 이런 문제들이 수면으로 떠올랐고 어느 정도 성적을 내기 시작하고 부터는 해외 전지훈련을 다니고 우리나라의 피겨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그녀는 허리부상도 있었다. 사실 없는 것이 이상하지. 그녀가 부상 회복을 위해 스케이트를 잠시 쉬자 언론은 선수생명이 위험하다며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등을 돌렸었다. 물론 우리의 여왕은 한 번 넘어졌다고 주저앉지 않고 누구보다 멋지게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렇다고 이게 이유일리는 없다. 힘든 환경에서 자라 결실을 맺은 운동선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그녀가 다른 것이 아니라면 내가 옛날보다 성장한 것일까? 그녀의 화려한 무대 뒤에 숨겨진 고통과 인내에 대해 더 가슴 속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미래의 누군가가 2009-2010 겨울 시즌의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와 올림픽의 결과를 살펴본다면 김연아의 우승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느낄 것이다. 대회 전에도 당연했고 결과도 너무나 당연했다. 내가 가슴이 깨달은 것은 이 당연하다는 사실에 대한 왠지모를 거부감이었던 것 같다.
당연하다고? 그녀가 이룬 것은 하나도 당연할 것이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생각해온 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보여준 표정은 당연히 완벽한 공연을 한 김연아가 아니었다. 그녀가 당연히 금메달일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김연아 본인에게도 그녀와 함께 출전한 선수들에게도 너무나 큰 모욕이었다. 나의 깨달음은 나를 짓눌렀고 반성하게 했고 당연한게 어딨냐는 의문을 가슴 속 깊이 심어주었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그 자리에 있기 까지의 모든 과정은 당연할게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싸워온 것은 다른 이들의 당연한 예측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녀는 이루었다. 그 눈물 뒤에 고통이 있었을 지 환희가 있었을 지 혹은 짜릿함과 안도감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눈물은 나를 자극했고 세상의 모든 당연한 것들에 대한 깨달음도 함께 주었다.
살다 보면 당연하다는 표현을 쓰게 된다. 이번 한국시리즈만 해도 당연히 삼성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시즌 시작 전에는 두산은 당연히 우승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두산이 우승하는 것은 정말 감동적일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고 모두의 예측을 뒤엎는 엄청난 노력과 드라마가 펼쳐진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당연히 삼성이 우승하더라도, 시리즈가 재미가 없더라도 같은 감동을 느낄 것 같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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